2011.04.22 (광케)

from 3 2012. 9. 20. 23:09

광희+케빈




  감기라는 것은 정말로 지독하다. 특히나 봄 감기라는 놈은 그 중에서도 더 하다. 감기로 앓은 지 사흘 째. 나는 드디어 코피까지 쏟고 말았다.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다. 이틀 전에 끝냈어야 할 프로젝트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나는 그래서 회사로 몸을 질질 끌고 와야만 했다. 열이 나서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출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고 나니 그나마 있던 힘도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죽으나 사나 운전을 했어야 했나.


  사람이 정말 열이 나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모니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올 리가 없었다. 차라리 코피라도 한 번 더 쏟아서, 그래서, 병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프로젝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사흘 째 골골대는 나를 알아주는 인간이 사무실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인간들은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좁은 책상 위에 엎어져 버렸다. 사무실의 소음들이 귓가에서 왕왕 울렸다.


  머리가 아프다.


  "…어디 아파?"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다.


  "괜찮아?"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문득 토기가 일어서, 고개를 들었다.


  "김지엽 씨. 오히려 그렇게 있는 게 더 방해인데."


  나보다 2년 빨리 입사한 광희 선배는, 날 꼭 '김지엽 씨'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두 살 연상이라 호칭이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날 부를 때 쓰는 '케빈'보다 '김지엽 씨'는 확실히 좀 딱딱한 감이 있었다. 다른 후배들이나, 선배들에게 대하는 것보다 날 좀 더 딱딱하게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픈 사람에게 저런 말이나 찍찍 내 뱉고. 사실은, 좀 얄밉다.


  "…죄송합니다."
  "똑바로 일을 못하겠으면 집에 가든가."


  얄밉다. 얄미워.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모니터를 노려본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바로 옆 자리에 앉은 황광희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들려오는 옅은 한숨 소리.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는 길에 병원을 들러 주사라도 한 대 맞고. 그리고.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


  회사를 관두고 싶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이틀 쯤 누워 있다가 나오고 싶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오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렌즈를 하고 오지 않았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뒤졌으나 안경은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는 계속 렌즈만 하고 다녔으니까…. 여러모로 오늘의 기분은 최악이다. 안경을 찾아서 가방을 뒤질 때도, 짜증이 나서 한숨을 내쉬었을 때도, 피곤해서 커피를 뽑아 왔을 때도, 난 황광희의 시선을 여러 번 느꼈다. 짜증이 왈칵 올라왔다.


  내가 정말 회사를 관둬야 하나.


  "김지엽 씨."
  "네?"
  "집에 가."
  "아…. 저기, 괜찮은데요."
  "그냥 가. 거슬려서 내가 일을 못하겠어."


  너무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수도 있구나. 황광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고개를 얼른 숙였지만, 더러운 꼴은 벌써 그에게 보이고 난 후인 듯. 황광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씨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콧물 때문에 꽉 막힌 코가 아려왔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그르렁 그르렁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서 따가운 목에서, 끅, 끅,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심시간이라서 다행이다. 


  "야, 야, 왜, 왜 그래!"


  당황한 그의 하이톤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머리를 울렸다. 집에 가고 싶다. 그의 말대로 난 집에 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을 하든가! 왜 울고 그러냐고 진짜."
  

  그가 내 어깨를 끌어안고, 그리고,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토닥토닥. 아 진짜 왜 그러냐.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뭔가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아프다. 2년 선배, 2살 연하. 무려 4년이나 내 앞을 가로 질러서 달리고 있는 어른 황광희가,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아까 얄밉다고 한 말은 취소. 그는 내 어깨를 도닥여 주다가, 나서서 내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가방을 내 가슴에 안겨줬다.


  "나머지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냥 가."


  사실 그와 처음 손발 맞춰서 준비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렸다. 네가 날 미워해도 어쩔 수가 없겠구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기침도 동시에. 그는 이번에는 화를 버럭 내며 내 등을 떠밀었다. 부장님한테는 내가 말해줄 테니까 얼른 가! 나는 또 가라는 말에 서러워진다. 원래 아프면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건가. 집에 가는 길에 버스를 탈 걱정을 하니 또 머리가 아득해져왔다. 그런 내게 황광희는 돈 2만원을 쥐여 준다. 택시 타고 가. 가는 길에 꼭 병원도 가라.


  나는 코를 훌쩍이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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