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0 (준삼)약속의날

from 3 2012. 9. 20. 22:59

이창선x양승호



1.



  꼭 다시 돌아올게.


  숙취가 덜 깬 어느 날 아침. 아주 오래 된 약속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그 약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떠올리려 애썼다. 어린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자그만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일렁거렸다. 나는 머리가 아팠고, 또 목이 탔다. 미안하지만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게는 오래된, 잊힌 목소리보다 당장의 갈증이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어디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인가보다’ 하고 쉽게 넘기기로 했다.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기억과 아침부터 싸울만한 기력이 내겐 없었다. 


  한 번 잊었던 목소리니까. 그런 기억이니까. 그럴만한 약속인거야.


  “어. 일어났네요?”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등장한 낯선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누구세요’라고 묻는 대신 그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눈을 몇 번인가 깜빡거리더니 곧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호선을 그리는 눈과 입술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생겼네.’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올 뻔 했다. 남자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 역시 마주 쳐다봤다. 조금 뚱한 표정이긴 했지만.


  “기억 안 나는 모양이네.”

  
  얼굴은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는데,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서운해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서운한 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안 그래 보이는데, 되게 소심한 모양이다. 나는 문득 그의 웃고 있는 입 꼬리를 잡아 당겨 우울한 얼굴로 만들고 싶어졌다. 우울할 땐 웃지 않아도 좋아. 언젠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남자를 따라, 밥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모양새만 그럴싸한 밥은 맛이 없었다. 간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군소리 하나 없이 밥을 깨작대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기대에 찬 표정이, 나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밥알을 씹으며 천천히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어제는 처음으로 큰 계약을 따낸 기념으로, 혼자서, 분위기 좋은 바에서, 그 분위기에 취해 잔뜩 들이부었다. 거기서 낯선 사람을 만났고, 2차를 가고, 또 들이부었고, 흥에 취해 카드를 그었다. 그리고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 비까지 부슬부슬. 골목 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났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내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아. 가볍게 미소를 걸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던 남자. 그 골목 한 구석에서 난 당신을 만난 거구나. 당신은 우산을 씌워주고, 비틀대던 나를 부축해주고, 그리고 젖은 옷을 갈아입혀 줬다. 


  “…밥이 입에 안 맞아요?”


  그래도 아침밥까지 챙겨주는 건 좀 오버했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맛이 없었다.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독설을 던질 만큼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밥을 깨작깨작. 그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어디서 본 듯한, 곤란한 미소였다. 그는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내 밥그릇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꽤 단호한 눈초리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요. 속도 안 좋을 텐데.

  어이가 없게도 그 눈을 보고 화가 났다.

  
  “입맛이 없어서 그래. 먹을 거야.”


  그의 손에서 다시 밥그릇을 빼앗아 와 보란 듯이 우적우적 씹었다. 반찬에는 가능한 손대지 않고 국과 밥 위주로 밥을 먹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불만이 섞인 눈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밥알을 씹었다. 씹고 삼키고.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아직도 알코올에 취해있는 위가 뒤집어질 것 같았다. 토하지 않으려고 말을 했다. 대화라도 하면 좀 나을 것 같은 기분이라서.


  “이름이 뭐야?”
  “…어제 얘기했어.”
  “은근슬쩍 반말이네. 몇 살이야?”
  “88년생.”
  “내가 형이네.”
  “몇 살인데?”
  “나? 너보다 나이 많아.”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한 살 차이’가 얼마나 큰 건지, 설명을 하려다 말았다. 입 아프게 설명해서 뭘 해. 보나마나 이 남자는 ‘한 살 차이는 사회에선 친구다’ 따위의 말을 믿는 사람일 거다. 친구라도, 1년분의 경험치가 다른 친구겠지. 나이대로 승진했다면 한 살 차이의 그 친구는 선배거나, 상사일 거다. 물론 나이대로 승진했다면. 능력만 좋으면 내가 형이지, 뭐. 아. 그래서 한 살 차이는 크지 않은 걸까. 그래도 어렸을 적엔 굉장히 큰 차이였는데. 


  “나 2월생인데.”
  “…맘대로 해.”
  “불만 있으면 그냥 처음대로 존대 쓸게.”
  “계속 볼 사이도 아닌데 뭣 하러.”


  그는 내게 눈을 맞추며 생긋 웃어보였다. 과연 그럴까? 라고 말한 듯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얌전히 식탁 위에 수저를 놓았을 뿐. 더 이상은 토기가 일어서 무리야. 그는 그 맛없는 반찬들을 보란 듯이 골고루 먹으며, 천천히 식사를 끝마쳤다. 어떻게 저런 걸 맛있다는 듯이 먹을 수가 있을까. 미각이 아예 망가졌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거나, 너무 익숙해져서 맛이 없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거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어버렸다.



2.



  낯선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른다. 그 아는 사람이란 게 며칠 전에 딱 한 번 봤던 사람일 뿐이라도.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는 카페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리를 한 쪽으로 꼬고, 눈을 내리깐 채로 뭔가 읽으면서. 그림 좋네. 누구는 점심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영업을 뛰고 있는데. 순간 왈칵 심술이 나서 손바닥으로 창문 유리를 꽝 쳐버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본다. 나는 눈을 맞추고 샐쭉 웃어보였다. 점심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뭐에요?”
  “‘뭐에요’는 뭐야?”
  “네?”
  “갑자기 웬 존대냐고.”
  “아.”


  얼빵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그제야 활짝 웃어 보인다. …쓸데없이 귀엽고 난리네. 나는 괜히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알바생을 불러 메뉴판을 받아냈다. 그는 보던 책을 덮고는 조용히 이쪽을 주시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샐쭉 웃어보였다. 


  “여기 식사메뉴 있지?”
  “아마도?”
  “나 하나 시킬게.”
  “그러든가?”
  “네가 사는 거지?”
  “어?”
  “밥 사달라고. 밥.”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다. 의미 없이 책을 들춰보고 딴청을 부리더니, 흘리듯이 ‘내 이름 기억해내면’ 하고 말했다. 당연히, 당연히. 기억 날 리가 없었다. 술의 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 녀석은. 댕강댕강 끊어진 기억의 파편 중, 그의 이름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고 해봐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는 것, 내가 제대로 걷지 못해서 그의 등에 업혔다는 것… 정도. 그리고 기타 등등의 내가 했던 헛소리들. 어째서 술에서 깨고 나면 취중에 했던 헛소리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지.


  “기억 안 나지?”

  
  그러니까 술의 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그럼 내가 사면 이름 가르쳐줄래?”


  들으나마나 오케이지, 뭐. 이름 하나 갖고. 가볍게 생각하고 내가 먹을 크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주문했는데,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민 하는 중인가 싶었는데 표정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솔직히 뻘쭘했다. 아무 얘기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우리가 좀 어색한 사이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 친한 척 굴었던가. 우리 아직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편해서 편하게 굴었더니 그게 문제였나 보다. 나는, 왜 이 남자의 눈치를 봐야하는지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조용히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이준.”
  “어엉?”
  “이준이라고. 내 이름.”
  “외자야?”
  “그 때도 똑같은 질문했는데.”
  “아….”
  “잘 마실게, 커피.”


  그는 내 쪽으로 커피 잔을 살짝 들어보이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웃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웃는 얼굴을 망가뜨려주고 싶었었는데, 지금은 다시 웃는 얼굴로 만들어 주고 싶다. 사람이 무표정하니까 무섭다기보다는, 좀 기운 없어 보인다고 할까. 어디 버려진 강아지마냥. 



3.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었나. 동생이 아주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온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였고, 엄마는 개털 알레르기가 있었다. 강아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에 내놓아야했던 것이다. 나는 동생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루도 아니고, 겨우 반나절 같이 있었을 뿐인데. ‘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놔라’는 엄마의 말에, 동생은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왜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걸까. 난 어린 동생이 처음으로 밉게 느껴졌다. 겨우 강아지 하나 가지고.


  그래도 형이라고, 동생이 강아지를 다시 갖다 놓으러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는 강아지보다 더 강아지 같은 모양새로 이창선이 웅크리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작고, 또 가장 못난 아이. 그 애는 동생의 품에 안겨 있던 강아지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이 예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너네 집 강아지야?
  응!


  이창선은 목이 부러져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동생의 품에서 강아지를 빼앗아 이창선의 품에 안겼다. 동생이 울먹거렸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젤리나 한 봉지 사다주면 그만이었다.


  다신 잃어버리지 마.


  동생의 말에 의하면 강아지는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데려가 주세요’라고 서툴게 쓴 글씨와 함께. 이창선도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강아지를 데려가면 혼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강아지를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집으로 다시 데려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뭣 보다 창선이의 얼굴이 너무 예쁘니까.


  “얼굴이 좀 익숙하다 싶었는데, 너 누구랑 닮았어.”
  “누구? 연예인?”
  “아니. 나 아는 사람.”
  “뭐. 아는 사람 누구?”
  “나 초등학교 때. 우리 반 최고 못난이.”


  강아지는 나중에 시골에 있는 이창선의 친척집에서 데려갔다고 했다. 창선이는 며칠은 시무룩하게 있었지만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일주일이 넘도록 퉁퉁 부어 있었다. 젤리 한 봉지 따위는 그 녀석에게 큰 소용이 없었다. 난 결국 저금통을 뜯어서 그 강아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 인형을 동생에게 안겨 주었다. 동생은 그 인형을 받고 나서도 이틀 정도는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난 엄마에게 정말 호되게 혼났다. 그 저금통은 가족 저금통이었으니까. 이틀정도 벌 청소를 하고 나서야 엄마의 화는 풀어졌고, 또 동시에 동생의 화도 풀어졌다.


  “지금 나 못 생겼다고 돌려 말하는 거지?”
  “아닌데…. 너 잘생겼잖아.”
  “와…”
  “왜?”
  “좋아서.”


  생긋 웃는 얼굴이, 역시 이창선이랑 닮았다. 



4.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면 친해진다는데. 준과는 이틀에 한 번꼴로 그 카페에서 마주쳤다. 나는 으레 식사메뉴를 시켰고, 준은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 그럼 함께 식사한 게 아닌 건가. 어쨌든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매일 가기는 회사와 거리가 좀 있다.- 이틀에 한 번은 그 카페로 가서 식사를 했다. 디저트도 맛있게 나오고, 가격도 착하고, 밥도 먹을 만하고. 같이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쁠 거 없었다. 


  준은 근처에 있는 단과학원의 강사였다. 생각보다 인기도 좋고 수업 평도 좋은 선생님인 것 같았다. 나이는 저번에도 밝혔듯이 나보다 한 살 아래. 평소에는 근사한 주제에 당황하면 말을 더듬고 얼굴도 금세 빨개졌다. 그래서 자꾸만 괴롭히고 싶어지는 인간이라고 할까. 자주 마시는 메뉴는 카푸치노. 커피는 잘 안 먹기 때문에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가 마시는 커피는 맛있어 보인다. 하지만 아직 한 모금도 얻어 마셔본 적이 없다. 취미는 운동. 그리고 영화보기. …둘 다 나와는 거리가 있어서, 학생 때 만났더라면 크게 친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낸 게 있다면 개를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이창선과 닮았다’라는 말을 썩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나 영화 시사회표 생겼는데.”
  “오. 무슨 영환데?”
  “뭐라더라. 한국판 블록버스터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나 줘. 나 줘. 나 줘. 나 줘.”
  “아니 안 그래도 줄려고 했어. 나 영화만 보면 자니까…”


  서류철 사이에 곱게 끼여 있던 영화 시사회표 두 장을 꺼내 준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놈이 받아놓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어이구. 그러고 있으면 한 대 때려서 울리고 싶잖아.


  “왜? 애인이랑 가.”
  “지금 애인 없어.”
  “그럼 친구랑.”
  “으으음…….”
  “친구 없냐?”
  “으으으음…….”


  너 왕따야? 

  하는 소리가 불쑥 튀어나올 뻔 했다. 성격도 둥글둥글하니 괜찮아 보이는데 영화 하나 보러갈 친구가 없다니 놀랍다. 준은 한참동안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영화 좋아한다더니 늘 혼자 가서 보던 거였나. 괜히 머쓱해져 먹지도 않는 피클을 포크로 콕콕 찔렀다. 피클아 미안. 못생긴 피클이 점점 더 못생겨지고, 못생겨지다 못해 형체를 잃어갈 때쯤,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가면 안 돼?”
  “…진짜 친구 없어?”
  “어. 어어….”
  “진짜 의외네….”
  “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같이 가주면 뭐 해줄 건데?”
  “어, 어어어…. 으으으음.”


  허 참. 영화표도 줘, 같이 보러 가줘. 그럼 뭘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아닌가? 아니면 마는 거지 뭘. 준은 고민스러움을 넘어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영화표만 쳐다보고 있었다. 대충 밥이나 한 끼 사주지. 내가 워낙 많이 먹어서 그 말 꺼내기도 곤혹스러운 걸까. 점심시간도 끝나 가는데. 빠릿빠릿하게 생겨서는 이상한데서 갑갑한 면이 있다, 얘도. 결국 나는 대답도 못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이 눈을 꿈뻑거리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가, 같이 가는 거지?


  나는 또, 이창선 닮았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참았다.



5.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졸리지 않겠지.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소리가 그렇게 빵빵하게 터지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서서히 감겨오고 있었다. 준은 내 쪽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실수로 이 갈거나 하진 않겠지.-내가 영화관에 가지 않는 이유 중에 한가지다. 친구들이 창피해서 같이 영화를 못 볼 수준이라고 한다. 드릴 소리가 난다나.- 하지만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안간힘을 써가며 들어올렸다. 영화 시작 전에 했던 준의 얘기 때문이었다.


  영화관에서 자면 소원 들어주기로 했던 거 무효야.
  그러든가.
  대신 내 소원 들어주기.
  와…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애가 되게 치사하다.
  어쨌든 자면 안 돼?


  안 돼, 안 돼, 돼, 돼요… 돼요… 돼….

  서울 시청건물이 화려하게 박살이 나는 장면을 기점으로,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6.




  기억났다.




7.



  꼭
  다시
  돌아올게


  어른이 되고 나서 약속이란 걸 믿지 않게 됐다. 꼭 돌아온다고 거듭거듭 말하고 연락 한 번 없었던 누구누구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살다보니, 약속이 항상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단지 그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언제였더라. 가벼운 남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갔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마 그런 것이 복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날은 봄이었다. 햇빛이 쨍쨍했다. 바람은 신선하고, 하늘도 예뻤다. 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그것마저도 예뻤다. 다 좋은 날이었다. 옆 반의 미정이가 날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창선이 왕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보 같아서. 못나서. 거기다 소심하기까지 했다. 나이가 한 살 적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반 아이들은 그 애를 더 심하게 놀려댔다. 툭하면 울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그 애의 예쁜 얼굴을 반 아이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반장이었다. 그래서 왕따에 가담을 하든 그렇지 않든 괜찮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이창선을 괴롭히지 않았다. 말리지도 않았다. 이창선과 단 둘이 남으면 얘기를 했다.


  비겁한 건 나였다. 도망갈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5학년 봄 이창선이 전학을 갔다. 인사도 없었다. 아주 먼 동네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애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 앞에서 강아지마냥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다. 바닥이 차가웠다. 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때 그런 소릴 들었던 것 같다. 꼭 다시 돌아올게.


  나중에야 깨달은 거지만. 그 애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애의 몸에서 희미하게 나던 모래냄새, 수업시간에도 쉴 줄 모르던 작은 손, 자꾸만 마주치는 작은 눈까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언제나 상상했다. 뭐라고 욕해줄 지 언제나 연습했다. 욕을 해주고, 호탕하게 웃어보여야지 생각했다. 그런 다음 꼭 안아줄 거라고, 보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8.



  멍청아, 아파!
  쉿. 아파도 좀만 참아.
  너 같으면, 너 같으면 참겠냐고! 아파!!
  어. 참아.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야!
  진짜 개 되는 꼴 좀 볼래?



9.



  배가 고프다. 나는 준의 맨 등에 ‘배. 고. 파.’ 세 글자를 쓴다. 매끈매끈하고 탄탄한 게 어디서 관리라도 받나 싶다. 아. 운동이 취미라고 했으니까. 운동하면 피부도 매끈매끈 해지나. 그럼 나도 운동을 해볼까. ‘배고파’를 아무리 써도, 준은 등을 꿈질꿈질 대기만 하지 큰 액션을 취해오지 않는다. 개새끼가 지만 힘든 줄 아나.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욕을 한 번 꾹 눌러 넣은 후 ‘이. 창. 선.’ 이라고 쓴다. 이래도 안 일어나면 두들겨 패줘야 되나. 내가 지금 두들겨 패 줄 힘이 있을까 모르겠다.


  “이준이랑 잠까지 자놓고 왜 자꾸 이창선 타령인데….”
  “창선아.”
  “아. 그렇게 부르지 마. 소름 돋는다.”
  “왜. 준이보다 좋은데 나는.”
  “그럼 나랑 왜 잤는데?”
  “어쩌다 보니까?”
  “와… 아….”


  준이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냉큼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진즉에 이렇게 마주보면 좀 좋냐. 하여간 굼떠가지고. 나는 준의 양 볼을 붙잡고 양쪽으로 쭉쭉 늘렸다. 아파하면서도 피하질 않는 게, 이건 굼뜬 건지 미안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화가 난건지. 모르겠다.


  “창선아.”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나 배고파.”
  “이창선한테 가서 얻어먹어.”
  “창선아. 밥 해줘.”
  “아이씨!!”


  준이 드디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체의 몸으로 씨근덕대는 게 나름 섹시한 맛이 있다. 할배 웃음을 헐헐 흘리면서 눈을 맞췄더니, 또 뭐라고 크게 말은 못한다. 준은 입술을 씹어 뜯으면서 나를 노려보고만 있다. 장난친다고 허벅지를 찰싹 때렸더니 옆쪽으로 몸을 피했다. 펄쩍 뛰면서 피하는 바람에 다리사이의 그것도 덜렁, 흔들린다. 아침부터 별꼴을 다 보네. 내 시선이 민망했던지, 준은 내게서 등을 돌려 바지를 다리에 꿰어 찼다. 그리고선 혼잣말 하듯이 내게 뭐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야, 이창선이야?


  “뭐라고?”
  “나야, 이창선이야!”
  “…네가 이창선인데 뭘 어쩌라고.”
  “이준이야, 이창선이야!!”
  “밥 해주면 생각해볼게.”


  씨근덕대며, 준은 그대로 방밖으로 나갔다. 분명 밥을 해올 거다. 맛없어서 남길 지도 모르지만. 맛있으면 이준. 맛없으면 이창선. 그럼 되는 거겠지.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03.13 준삼썰  (0) 2012.09.20
2011.02.23 준삼  (0) 2012.09.20
2011.02.11 준삼썰  (0) 2012.09.20
2010.12.21 병탬  (0) 2012.09.20
2010.12.13 탬썰  (0) 2012.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