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1 병탬

from 3 2012. 9. 20. 22:58

정병희x이태민



1.


  계속 비어있던 옆집에, 상당한 미모의 모자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사 첫날 우연히 본 뒤로는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 것이었다. 아들 쪽은 아직 학생인 것 같던데 등교 시간에 종종 마주 칠만도 하건만 전혀 보질 못했다. 혹시 학교를 안 다니나? 설마 그 외모로 대학생일리는 없고. 남의 일을 궁금해 하고 혼자 골치 썩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지라, 나는 곧 이 일을 덮기로 했다. 이사 떡 안돌린 게 좀 괘씸하긴 했지만, 요즘은 이사 떡 돌리는 사람이 잘 없긴 하니까 그것도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러 오는 게 보통 아닌가…? 하여간 좀 예쁘다고 말이야.


  딩- 동-


  멍하니 앉아 있다가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서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 늦은 저녁에 누구야. 혹시 택배인가? 주문한지 하루도 안됐는데. 설렘 반 짜증 반 문을 열었더니, 옆집 애가 서 있었다. 녀석은 사내답지 못하게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며 서 있다가, 내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내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눈을 마주봤더니 또 한동안 우물쭈물. 이쪽에서 하도 답답해서 먼저 말을 걸고야 말았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못이랑…망치 좀 빌릴 수 없나 해서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기어코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본다. 예쁘게 생기긴 했는데, 이렇게 답답해서야. 뭐 그래도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 내가 대답도 없고, 한동안 자기만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뒤늦게 '옆집에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하고 개미만한 소리로 말했다. 얘 혹시 학교에서 왕따나 안당하나 몰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찾아볼 테니 안에 잠깐 앉아 있다 가라고 했더니 고래를 짤레짤레 흔들며 한사코 거절한다. 또 싫다는 사람 억지로 어떻게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닌지라, 내버려두고 못과 망치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찾다보니 또 괘씸한 마음이 왈칵 들었다. 이사 떡도 안 줘놓고.


  "근데 왜 이사 떡을 안 줘요?"


  라고 했다가는, 어린 애 앞에서 추태 부리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못과 망치를 찾아 녀석에게 건네려는데, 문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사 떡과는 별개로 말이다.


  "근데 이거 어디 쓰려구요?"
  "네? 아… 가족사진 달 건데요."
  "…지금?"
  "네에…."


  녀석은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못 하나 박는 데 얼마 걸리진 않겠지만. 쿵쿵대는 소리가 내 망치로 인한 것이라면 좀 불쾌할 것 같다. 내가 못과 망치를 손에 들고 좀처럼 제게 주질 않자, 녀석의 표정에 약간의 불만이 섞여 나왔다. 그래서 뭐. 내가 안 빌려주면 그만인데. 녀석은 추우니 어서 달라는 표시로, 얇은 티만 입고 있는 팔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문질 거렸다. 그래서 뭐. 그러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잖아. 나는 녀석의 조그만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못만 그 위에 올려두었다.


  "못은 박을 줄 알아?"
  "네? 그냥 대충…"


  자연스레 말을 놓아버리는 나를, 녀석은 톡 쏘아보았다. 하긴 니 나이에는 막 말 놓고 이런 게 신경 쓰이지. 나는 갑자기 그 동글동글한 바가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고 관두기로 했다. 다분히 왕따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이 좀 있는 모양이다.


  "내가 가서 박아줄까?"


  농담 삼아 꺼낸 얘긴데, 녀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힘껏 도리질을 쳤다. 왠지 엄청 기분 나쁘다. 내가 뭐 나쁜 말 한 건 아닌데. 혹시 엄청 남이 집에 오는 걸 싫어하는 건가? 현관에서 한 발짝도 안 들어오려고 하는 꼴도 그렇고,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나는 혼자 그렇게 수긍해버리고는, 녀석의 손 위에 드디어 망치를 놓았다. 추운데다가, 기다렸기 때문인지 녀석은 계속 표정이 굳어있었다. 사람이 물건을 빌렸으면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나 할 것이지. 난 짧게 혀를 치고는 '잘가라'고 인사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참 인사성이 좋단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망치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못은 써버렸다고 쳐도 망치는 돌려줘야하는 거 아닌가? 이사 떡도 그렇고, 한사코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태도도 그렇고, 망치까지. 도무지 내 상식선에선 이해가 안가는 인간들이었다. 그렇다고 망치가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 집에 달려가 망치를 왜 안주냐며 성내는 것도 꼴이 조금 우스웠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오늘까지만 기다려보자고 마음을 먹고 귀가하는 길에, 놈을 발견했다. 왕따치고 참 대담하게도,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요즘은 중학생도 담배를 피우나?"
  "…중학생 아닌데요."


  농담반 진담반 꺼낸 말이었는데 녀석은 진심으로 기분 나빠하며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빼서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나를 피해 그네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팔목을 꽉 붙잡고 다시 주저앉혀 버렸다. 예쁜 미간이 사정없이 접힌다.


  "야. 내 망치 왜 안줘?"
  "야.가 아니고 태민이거든요. 이태민."
  "야 니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안주냐고 망치를."
  "가족사진을 아직 못 걸었어요."


  뚱한, 하지만 어딘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뭐야. 박아준다고 할 때 거절한 사람이 누군데. 괜히 열 받고 성질내는 게 싫어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녀석은 커다란 눈을 멍청하게 꿈뻑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째려보면 뭘 어쩔 건데. 한숨이 절로 났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맥주 한 캔에 시시껄렁한 티비프로라도 보며 기분을 풀고 싶었다.


  "그럼 망치 쓰는 대로 갖다 줘라."


  나는 그렇게 쿨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돌아보니 녀석이 내 양복자락을 뜯어져라 쥐고 있었다. 얼마 전에 할부로 그은 건데, 진짜 큰일 날 애네 얘가.


  "아저씨 진짜 호모 맞아요?"
  "어엉?"
  "호모죠?"


  '호모'도 적잖이 충격이었지만, '아저씨'는 더 충격이었다. 나 아저씨 소리 들을 정도로 늙지 않았는데. 내가 멍하니 내 양복자락을 쥐고 있는 제 손만 보고 있자, 녀석은 찍 소리도 하지 않고 손을 놓았다. 녀석은 망치를 빌리러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애써 표정을 감추지만 두 눈은 어쩔 줄 모르고 한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한다. 컴컴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 같기도 했다. 아울러 귀와 목까지도.


  "나 아저씨 아니다? 아직 서른도 안됐거든?"
  "윗집 아줌마가 아저씨 호모랬어요."
  "아저씨 아니라니깐."


  아ㅡ. 그 아줌마는 왜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건지. 내 집에서 내가 떡치는 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되냐고. 머리에 한 가득 열이 차서,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껌만 한통 나왔다. 금연 선언을 한지 열흘 정도 지난 걸 그제야 깨닫는다. 껌이라도 씹을까 하다가, 녀석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 뭐하는 짓이에요!"
  "씁. 조용히 안하냐? 너네 엄마한테 이른다?"


  녀석, 태민이는 한동안 조용히 나를 노려보다가 애꿎은 땅만 차댔다. 덕분에 내 구두와 바지 밑단에 모래가 철벅철벅 튀었다. 이노무 새끼가. 아침마다 내가 구두를 얼마나 정성들여 닦는데. 불쾌함의 표시로 발목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녀석은 무반응이었다. 난 씩씩거리며 담배를 태우고, 녀석은 녀석대로 땅을 파고. 상당히 어색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걸 눈치 챈 것은 담배가 거의 필터 앞까지 탔을 때였다.


  "야. 내가 호모면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요."
  "뭐 나한테 반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아닌데요."
  "너도 내 취향 아니야, 임마."


  정말로 울컥해서 한 말이었지만, 이태민은 사실 존나 내 취향이었다. 쌍꺼풀진 큰 눈하며, 여리여리한 몸, 자그마한 손까지. 새초롬한 표정으로 톡 쏘아봤을 때는 정말, 너무 예뻐서 가슴이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웃는 얼굴은 진짜 더 예쁠 텐데. 지금까지 본 표정은 뚱하거나 굳어있거나 둘뿐이니. 예쁜 얼굴 잘 활용해서 애교라도 살살 부리면 그깟 망치쯤 줘버려도 되는데. 준다 뿐이겠어? 망치 한 트럭은 그냥 사준다, 내가. 얜 정말 생긴 거랑 다르게 참 애교가 없다. 눈웃음 살살 치면서 말꼬리면 조금 늘려줘도 껌뻑 넘어갈텐데 말이다. 이러니 왕따를 당하지.


  "호모 맞죠?"
  "담배 잘 피웠다. 다음에 갚을게."


  이번에야 말로 쿨하게 뒤돌아 나왔다. 어른스럽게 녀석의 뒤통수도 살짝 토닥여주고 말이다. 담배 한 개비 정도, 갚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사실 금연 중이라 실제로 주머니에 담배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가게 하나 뚫어서 힘들게 사는 걸 텐데, 하나하나 소중한 담배일 테니까.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거지, 뭐. 난 누구랑 다르게 아주 예의도 바르고, 입에 발린 말도 잘 하는 인간이니까. 물론 이사 떡 안 준거랑 쌤쌤 치면 난 더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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