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3 (병삼) 병신과머저리

from 3 2012. 9. 20. 22:55

정병희 x 양승호



1.


  잠에 취해 소파 위에 널부러져 있던 내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감 하나가 더해졌다. 은은하지만 역하게 풍겨오는 알콜 냄새에 절로 미간이 접혔다. 은은하게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언제 들어도 목소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단 말이야. 애써 다른 생각을 끌어내도, 이 달갑지 않은 상황은 변하지가 않는다. 꽉 닫힌 내 눈가에 입술이 닿아왔다. 축축하고, 알콜 냄새를 머금은. 몸에 힘이 빠지는 동시에,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진다. 긴장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두려움 때문인지. 어깨를 물고 있던 긴장의 끈은 곧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난 그제야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양승호야."


  난 이 눈빛을 잘 알고 있다. 정병희가, 양승호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눈. 곧 터질듯한 열기가 일렁대는, 욕정의 눈빛을.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닮아있다. 숨이 막힐듯 강렬하고, 날카로운 탐욕이 살아있다. 술에 취한 정병희는 위험하다. 평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그 눈빛을 감추려들지 않는다.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또 너무 진지하게 내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다음날이면 기억도 못하는 주제에, 술에 취한 밤이면 나를 끈질기게 괴롭혀온다. 나는 그의 먹잇감 따위도 아니고, 배설을 위한 화장실 따위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금이 저려오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꼼짝도 못하는 것일까. 이 눈빛에 압도 당하고 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너희에게 노려지는 사냥감 따위가 아닌데.


  "…주정 부릴 거면 씻고 잠이나 자라."  
  "키스까지만 할게."
  "씻기 싫으면 그냥 자고."
  "승호야…"


  그렇게 불러도 소용없어. 그런 눈빛을 하고 '키스까지만'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나는 있는 힘껏, 정병희를 밀어냈다. 식은 땀이 났다. 정병희는 너무나 허무하게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시야가 흐리고, 손이 떨렸다. 오한이 일었다.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인데, 놈의 열기는 아직도 나를 끔찍하게 집어삼키려고 든다. 정신을 잃고 싶을 만큼 괴롭게 옥죄어온다. 통증은 온몸을 잡아먹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열은 머리를 마비시킨다. 결국엔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나는, 왜 너를 용서했을까.


  나는 정병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나는 강간이라는 것을 당한 적이 있었다. 섹스라기 보다는 폭력에 가까운 짐승같은 행위. 고함소리. 고함소리. 고함소리. 그리고 억눌린 신음. 살이 부딪히며 나는 천박한 소리. 얼굴 위에 마구 쏟아지던, 뜨거운 숨. 오한이 일었다. 내가 왜 너를 용서했을까. 후회스러웠다. 너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은 것을. 여전히 넌 내 친구라고 믿었던 것을. 그리고 간혹, 너, 정병희를 만난 것 자체를 무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식은 땀이 나고,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리고 불시에 정병희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야, 괜찮…"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어?"
  "나가라고."
  "야…"
  "미안"


  진짜 너 같은 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정병희가 나간 자리를 노려보며, 난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리려고 노력했다. 정말 병신같다. 너 같은 게 그러고도 친구라고. 아직도 곁에 남아있는 건지. 너 같은 건 진작에 끊어버렸어야 했다. 술에 취한 다음날도 기억 못하는 척 연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를 작정하고 엿 먹이려면, 못하는 게 없었으니까. 그 정도 연기 쯤이야. 너 같은거, 너 같은 거, 이미 예전에 떨쳐 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질척거리고 있을까.


  우리는. 아니. 너는. 나는.




2.


  걔랑도 잤냐?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새 애인을 소개 시켜주고 싶은건지, 날 엿먹이고 싶은건지 정병희의 의중이 궁금했다. 속이 더부룩하다.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안주고 뭐고 맛도 없고. 내가 왜 정병희 때문에 또 이렇게 속이 뒤집어 질 정도로 화가 나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정병희가 애인이라고 소개시켜 준 여자애는, 올해 우리 과에 들어온 신입생으로 양승호의 배 다른 동생이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받던 애였다. 그러니까, 양승호 '짝퉁'. 특 A급도 아니고, S급도 아닌 그저 짝퉁. 닮게 고쳐달라고 해도 저정도는 아닐거다. 계집애가 뜯어 보면 뜯어볼수록 별론 게, 애교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고, 건방지고, 때론 과격하기까지 했다. 붕붕 날아 다니며 남자애들을 패질 않나, 새로 산 기계를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보질 않나. 먹을 건 또 얼마나 밝히는 지 남자 앞이라고 내숭 떠느라 조금 먹고 남기는 경우도 없었다.


  "그게 매력이지, 우리 애기는."
  "오빠앙~ 증말요?"
  "그러엄~"


  쟤가 저런 애였나. 애교가 없기는 지랄. 지랄도 이런 쌍 지랄은 또 처음이다. 짝퉁끼고 노는 것도 보기 싫어 죽겠는데, 이쪽으로는 죽어라 시선을 던지지 않는 건 더 베알이 꼴렸다. 내 연줄로 남의 과 모임에 앉아 있는 거면, 나한테 붙어있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내 주변에 앉아 있던 인간들이 정병희 쪽의 테이블로 슬금슬금 옮겨가는 것을 목격한 후,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어봐야 좋은 꼴도 못보겠다. 내가 일어나도 별 붙잡는 시선도 없다. 구리구리한 면상 들이댈 거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뜻이겠지. 나도 흥이다. 끝까지 쳐다도 안보는 너. 정병희 너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내가 막 가게를 벗어났을 때였다.


  "야. 니가 나가면 난 어쩌라고."
  "잘 놀더만, 뭘."
  "그래도 우리 과도 아니고."
  "우리 애들 전부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데. 가서 놀아."
  "…삐졌냐?"
  "뭐?"
  "에이. 우리 삐순이 또 삐졌구만?"


  너 걔랑도 잤냐?


  정병희의 얼굴을 하도 오랜만에 마주하고 있었더니, 술자리 내내 꾸역꾸역 삼키고 있던 질문이 불쑥 튀어 나왔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입 밖으로 톡 튀어 나가버려서, 되돌릴 수 없게 될까봐 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입을 콱 다물어버리자, 깐족대던 정병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아차 싶었던 순간, 정병희의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술에 취했구나. 마른 침이, 정적 속에서 느리게 목 뒤로 넘어갔다. 기회, 라는 단어가, 순간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간 듯도 했다.



  "야. 애인 생긴 거 말 안할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가지고…"
  "…내가."
  "삐지고…어?"
  "내가 널 왜 곁에 뒀다고 생각하냐?"
  "뭐라고?"
  "내가. 왜. 널. 용서했겠냐고."



  순식간이었다. 화가 난 음성이, 기도를 타고 흘러나왔다. 차라리, "걔랑도 잤냐"는 말이 더 나았을텐데. 멍청이. 병신 같은.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고 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는데도, 머리로 열이 바짝 오른다. 그 열로 인해서,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기까지 하다.


  "……"


  이상했다. 정병희는 여전히, 얼굴은 물론 목 뒤까지도 빨갛게 달아올라있는데, 눈빛은 평소의 배로 날카로웠다. 이제와서 왜 그러는걸까. 평소같이 멍청한 표정으로 감추면 좋을텐데. 멍청한 농담들로 덮어버리면 좋을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건데. 멍청했다. 너무나 경솔했다.



  "그건 내가 더 묻고 싶다."



  생전 처음 보는 싸늘한 표정으로, 병희가 씹어 뱉듯 말했다.



  "넌 대체 나랑 뭘하고 싶은 건데?"



  몸이 떨리고, 그 반동으로 눈 두덩이가 시큰하게 울리고, 또 그 반동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그 사이로, 정병희를 찾으러 나온 짝퉁이 멀리 보였다.




3.


  내가 여자였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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