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앵) 


  날씨 한번 되게 구리네. 체육관 구석에서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잡지를 팔랑팔랑 넘겨보던 아오미네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우산 같은 거 없는데. 그의 앞에 주저앉아 농구공을 닦던 사쿠라이가 그를 흘끗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먼저 가셔도 되는데." 그 말을 듣고 왠지 민망하고, 또 한편으론 괘씸한 마음에 아오미네는 사쿠라이의 머리를 보던 잡지로 착 때렸다. 그리곤 "너 기다리는 거 아니거든."하는 것이었다. 사쿠라이가 어깨를 움찔하며 "죄송해요."라고 웅얼거렸다. 쯧. 아오미네는 혀를 차고는 그의 왜소한 등을 노려보았다. "우산 있냐?" "네? 네에. 사물함에 늘 하나씩 넣고 다녀서…." 흠. 아오미네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까짓 기다려주지 뭐. "뭐 도와줄 거 있냐?""어, 없는데요." "그래…?" 아오미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쿠라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사쿠라이는 또 자그만 소리로 "죄, 죄송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뭐 죄송할 거까지야. 아오미네는 아예 벌렁 누워서는, 사쿠라이가 농구공을 열심히 닦아대는 모습을 구경했다. '비가 많이 오려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청목) 


  "더러워, 게이새끼."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아오미네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키요시가 그의 시선에 걸렸다. 키요시는 슬픈 눈을 하고 있다가 아오미네의 눈길이 느껴지자 '아차'하는 느낌으로 얼른 표정을 바꿨다. 워낙 순식간이라 눈치가 둔한 사람이라면 아오미네의 발언에 그가 기분이 상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오미네의 입 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는 약간 떨어져있던 키요시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어깨동무를 했다. 아오미네의 팔 안에 키요시의 어깨가 빠듯하게 들어찼다. 그의 잘생긴 눈썹과 입 꼬리가 부자연스럽게 움찔거리는 것을, 아오미네는 확실히 보았다. 글쎄, 이런 게 좀 귀엽기도 하고. 십대 남자아이들이 뒤섞여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오미네는 키요시와 눈을 맞추며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턱과 볼을 꾹꾹 누르는 것이었다. 키요시의 시선이 파르르 떨린다. "무슨…?" 키요시가 짐짓 불쾌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오미네는, "아 선배 얼굴에 김이 묻어서."라고 사뭇 진지하게답했다. "뭐?" 키요시가 되물었고, 아오미네는 "잘생김!"이라고 외치며 파하하 웃었다. 




(청립) 


  「보고 싶다.」 


  메일 주소를 교환한 이후로, 카사마츠로부터 온 첫 번째 메일이었다. 그렇게 얘길 하면 좀 애매한데, 카사마츠가 이쪽으로 먼저 메일을 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늘 답장은 착실하게 하는 타입이었다.) 늘 보고 싶다고 칭얼거려도 「적당히 해라」라는 매정한 대답뿐이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 것일까. 아오미네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그 앞에 휴대폰을 놓고서, 한참이나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카사마츠 상에게서 온 것이 맞았다. 설마 친구라든지 장난 치는 건가. 아오미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나도.」라는 답장을 찍어 내려갔다. 그러나 점이 제대로 찍히기 전에, 다시 한 번 메일이 왔다. 


  「보고 싶다고. 아호미네.」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선배인걸. 아오미네는, 전화를 바로 할까 하다가, 혹여 그가 부끄러워서 돌연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 메일로 하기로 했다. 카사마츠가 끙끙대며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슬며시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한번만 더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들었지만, 그랬다간 얼마나 맞을지 모르니까. 


  「나도. 유키오.」 


  화낼까…. 아오미네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침대 위를 뒹구르 굴렀다. 아. 목소리…듣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 시계가 벌써 새벽 1시를 훌쩍 넘었다. 아오미네는 휴대폰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뒹굴, 굴렀다. 빨리. 답장 좀 빨리 하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마치 사랑에 빠진 10대 소녀 같아서, 아오미네는 잠깐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딴 건 금세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카사마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부르르ㅡ. 휴대폰 진동이 채 한 번도 제대로 울리기 전에, 아오미네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서 '너무 일찍 받았나'하며 민망한 생각이 들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카사마츠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사마츠 상?" 
  [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카사마츠는 그렇게 말하며 "푸하하핫!"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즐겁고 우스운 모양이었다. 평소보다도 톤이 훨씬 높고, 웃음소리도 경쾌하다. 아오미네는 속으로 '자기가 먼저 보고 싶다고 해놓고선….'하고 꿍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직은 목숨이 소중한 탓이다. 아오미네는 대신, "어. 정말 보고 싶었어."라고 돌덩이 같은 직구를 날렸다. 그러자 수화기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그치고, 잠깐 숨소리만 들리는 것이었다. 아마 얼굴이 빨개진 채로, 또 멍청한 표정으로 할 말을 찾고 있을 것이다. 


  [우와… 넌 부끄럼도 없냐. 이 자식.] 


  우와아ㅡ하고 중얼거리는 발음이 어딘지 뭉툭하다. 시간도 시간이고, 대학생이란 신분도 달았겠다, 부모님도 없고 자취 중이고…. 약을 했거나 술을 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물론 뼛속까지 스포츠맨인 카사마츠에겐 후자의 가능성 밖에 없겠지만. 카사마츠가 숨이 가쁜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이쪽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카사마츠 상." 
  [으응.] 
  "술 마셨어?" 


  카사마츠는 아오미네의 물음에 답지 않게 우헤헤 웃었다. 


  [으응. 조금~? 보고 싶다, 아호미네….] 


  마치 어리광처럼 말끝을 늘이며, 카사마츠가 중얼거렸다. 카사마츠는 그 다음에, "왜 어린애인 거야, 이 자식. 덩치만 커다래선. 아니 그래서 좋지만."하고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이어나갔다. 아오미네는 자신의 연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이 너무나 신선하고 흥미로워서 잠시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카사마츠는 "술… 마시면 즐거운데. 같이 먹지도 못하고. 그리고 넌 말야. 눈빛이 너무 나쁘다고.그런 것까지 좋게 보이면 어쩌자는 거야…."하고 중얼중얼 몇 마디 더 읊조렸다. 그리고는 불현듯, "어이, 듣고 있는 거냐"하고 아오미네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지금 너네집 앞이니까.] 


하고 꺼질듯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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