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먈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뽕삼 2014. 2. 2. 22:58

 

1.

5월이 가정의 달, 즉 가족을 위한 이벤트가 모여있는 달이라면, 11월부터는 단연 연인들을 위한 이벤트가 많다. 빼빼로데이,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화이트데이, 뭐 기타 등등. 원식이 선물을 받은 것은 그 수많은 날 중 그 어떤 날도 아니었다. 불쑥 내밀어진 선물 상자가 당황스러웠다. 선물 상자에는 본인이 묶었는지 의심스러운 예쁜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하긴. 그 하얗고 긴 손만 본다면 본인이 포장을 했다고 말해도 쉽게 믿을 터였다. 선물을 받고 고개를 들자 유난히 까맣고 반들반들한 눈동자가 원식을 쏘아보고 있었다.

 

 

“…추워 보이셔서.”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이톤의 곱고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묘한 여운을 주었다. 늘씬한 몸은 한치의 아쉬움도 없이 빙글 돌아선다. 원식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정택운. 개인적으로 인사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학생이었다. 담임은 물론 아니었고(원식은 이번 해 담임 자체를 맡지 않았다.) 택운은 심지어 담당 학년도 아니었다. 3학년은 대타로 몇 번 수업을 한 것이 다였으니, 그들의 만남이란 것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축구부에서 활약이 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원식이 축구부를 맡기 전에 택운은 축구를 그만 뒀다. 그래도 후배들을 보러 한 번 정도는 들릴 법도 하건만, 택운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원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와 상자를 풀어보았다. 아이보리 색의 목도리와 털장갑이었다. 목도리는 그렇다 쳐도 털장갑이라니. 심지어 벙어리인 것을 보고 원식은 그야말로 벙쪘다. 아직 교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이런 깜찍한 선물을 학생에게 받은 것은 처음이었고, 또 길이길이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2.

곧 수능이었다. 그 증명이라도 되는 듯이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원식은 조금 이르지만 택운이 선물해준 목도리를 꺼냈다. 새벽부터 교문지도를 할 때는 무조건 따수운 게 최고였다. 얇은 피코트에 커다란 목도리만 둥둥 싸놓은 꼴이 퍽 우습기도 했다. 올해는 패딩 점퍼를 사야겠다고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린 원식은, 목도리를 꼭꼭 두르고 있음에도 추위에 벌벌 떨었다. 유난히 추위에도 약하고, 아침에도 약한 원식이었다. 원식은 교문을 첫 번째로 지나간 여학생이 준 손난로를 손에 꼭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택운이었다.

 

택운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차림새로 교문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있었다. 택운은 원식에게 꾸벅 인사하며 그의 목에 칭칭 감긴 목도리를 곁눈질했다. 그러고선 제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원식의 손에 꼭 쥐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난로를 빼앗아가는데, 원식은 그 어떤 방어도 할 수 없었다. 그저 , 고맙다.”하고 웅얼거릴 뿐이었다. 택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선 원식을 지나쳤다. 커피. 마시던 것 같은데. 쟤는 애가 왜 애 같지가 않지. 원식은 생각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다시 바닥에 뱉어냈다. 너무 뜨겁고, 또 너무 썼다.

 

 

 

3.

원래도 3학년 수업을 맡지 않긴 했지만,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3학년에게 체육 수업이란 없는 것과 같았으므로 원식이 택운을 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 택운이 원식을 괴롭히는 빈도가 늘어났다. 물론 직접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원식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택운이 조근조근 선생님하고 원식을 부르곤 했다. 덕분에 밤을 새는 일도 허다해졌다. 실제로는 택운이 선생님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침 회의 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원식은, 도저히 안되겠는지 1교시 종이 울리자마자 양호실로 향했다. 마침 오전에는 수업이 하나도 잡혀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연령대가 맞는 양호선생 홍빈이 욕으로 원식을 반겼다. 원식은 이 추운 날 체육관의 먼지 많은 매트 위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홍빈이 뭐라고 하든 쫓겨나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그리고 가물가물 잠이 들려는 찰나, 원식을 괴롭히던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선생님……?”

 

 

원식은 처음에 또 다시 환청을 듣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리는 가짜가 아니었다. 원식이 누운 사이 홍빈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원식은 잠깐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갈 타이밍을 쟀다. 아니 뭐 굳이 나갈 필요가 있나. 원식은 또 다시 가물가물 잠이 오기 시작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흰색의 커튼의 걷어진 것은.

 

 

“…선생님.”

 

 

귓속으로 꼭꼭 박혀오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으랴. 원식은 몸을 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호선생님은요?”

잠깐 화장실이라도 갔나….”

 

 

하하. 하고 원식이 어색한 웃음을 덧붙였다. 택운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양호실 장부에 학번과 이름을 써내려 갔다. 악필이다. 공부 되게 못하나 봐. 원식은 저도 모르게 빤히 택운의 손을 쳐다보고 있다가, 택운이 저를 보는 시선에 후닥닥 시선을 거뒀다.

 

 

혹시 두통약….”

두통약?”

 

 

택운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통약이라면 홍빈이 늘 서랍에 넣어놓고 다니는 것이었다. 원식은 자연스럽게 서랍을 뒤지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아파? 열은 안 나고?”

“…조금이요.”

 

 

원식은 고개를 들고 택운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땀도 좀 나는 것 같고, 확실히 머리에 열이 좀 있다. 그냥 조퇴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원식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택운의 뺨과 목에도 손을 한 번씩 가져다 댔다.

 

 

, 저기,”

 

 

택운이 원식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나갔다. 얼굴이 새빨갛다. 원식은 택운의 빨개진 귀 끝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손이 뜨끈뜨끈했다. 택운이 열이 올라 울망한 눈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원식은 두통약과 해열제를 택운에게 들려주고선 자다 가라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대로 양호실을 빠져 나왔다.

 

 

 

4.

원식의 자전거가 고장 났다. 다른 생각을 하며 허둥대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완전 박살이 나고 말았다. 특유의 운동신경으로 다치진 않았지만 입 안이 쓰긴 썼다. 꽤 돈을 들여 구입한데다가 매일매일 들였던 공이 꽤 컸던 탓이다. 자전거를 수리점에 맡기고 원식은 대신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원식이 탈 때만 해도 자리가 텅텅 비었던 버스는, 두세 정거장이 지나가 학생들로 빡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원식은 본 것이다. 정택운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택운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침이라 퉁퉁 부은 하얀 얼굴이 원식의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그는 어쩐지 여학생들 틈바구니에 섞여있었으며,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버스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그는 휘청거리는 여학생들의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그다지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택운의 입술이 삐죽하니 나와 있는 것을 원식은 마치 예술작품이라도 감상하듯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원식은 내릴 곳을 지나칠 뻔 했다. 서둘러 버스에서 빠져 나와 학교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턱 하니 팔목이 잡혔다.

 

 

“…목도리는요?”

 

 

택운이었다. 다짜고짜 목도리 타령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오늘은 날이 상당히 따뜻했다. 채근하듯  물어오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있어 원식은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택운의 흰 목덜미는 휑한 것이 어딘지 추워 보였다.

 

 

자전거는 어쩌구요?”

 

 

과묵한 택운이 두 마디째 말을 걸었다. 원식은 멍하니 방치해둔 얼굴을 수습하고선 망가졌어.”하고 작게 대답했다. 택운의 빛깔 좋은 입술이 씰룩였다. 원식은 그것이 웃음을 참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조금 지난 뒤에 깨달았다.

 

 

영영 안 고쳐졌음 좋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택운은 원식의 손을 잡아왔다. 원식은 갑자기 손을 잡는 시커먼 제자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맞잡아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택운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추워 보여서.”

 

 

그날과 꼭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택운은 원식의 손을 놓았다. 원식은 오래도록 택운의 손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모르는 사이 아이의 마음 속에서는 우리의 관계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5.

수능 전날. 원식은 오전부터 체육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바닥에 매트를 깔아놓고, 매캐한 먼지 냄새를 맡으면서. 배 위엔 납작한 선물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초콜릿과 엿, 손난로 인형 등 잡다한 것이 잔뜩 든 것이었다. 3학년은 아마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원식은 저가 왜 고민하는지가 고민이었다. 목도리의 답례라고 생각하고 주면 그만이었다. 반도 알겠다, 얼굴도 알겠다, 이름도 알겠다 못 가져다 줄 이유가 없었다. 교사는 늘 공정해야 해. 원식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택운에게 주려던 초콜릿은 이미 몇 개 까 먹었다. 속이 헛헛하니 단 것이 당겼다.

 

 

선생님.”

 

 

어디서 또 환청이….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식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원식의 배 위에 있던 상자가 반 바퀴 굴러 원식의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와르르르. 초콜릿과 엿 등이 부딪히며 소음을 냈다. 택운의 눈이 집요하게 그것을 쫓는다. 원식은 괜히 땀이 났다.

 

 

, 여기는 웬 일이야?”

 

 

원식이 주섬주섬 상자를 엉덩이 옆으로 치웠다. 택운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상자 안을 확인했다. 택운의 얼굴에 미소가 만면하다. 택운이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것을 원식은 처음 보았다. 껍질만 남은 초콜릿이 원식의 뒤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택운이 다짜고짜 뒷덜미를 잡고 입을 맞춰왔다. 원식은 그저 눈만 꿈뻑였다. 택운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원식은 괜히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찰나에 닿았던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 체육관에서, , 뽀뽀를. , 학생이랑.

 

원식은 기절할 것 같았다. 초콜릿을 까서 입 안에 넣고 다시 덤벼드는 택운의 얼굴이 너무나 해맑아서 더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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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너무 늦은데다가 뭔가 좀...... 뭔가 좀 너무 싱거운......

올해 생일엔 미리 쓸게요 미안해요 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