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식 미완
1.
김원식은 재주가 많았다. 꼭 어디 춤 추고 노래 부르는 자리엔 빠지는 적이 없었고, 거기에 작곡도 꽤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가수 준비를 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다가 운동 신경도 좋아서, 1학년 때부터 여러 운동부에서 러브 콜을 받기도 했다. 아무래도 예체능 쪽으로는 타고난 것 같았다. 조막만 한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는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멋들어지기도 했다. 김원식이 입으면 ‘저게 과연 내가 알던 그 교복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원식은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학생들 사이에선 유명인사였지만, 떠들썩하게 사람을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사귀는 여자친구도 없었고, 명성에 비해 고백을 받는 횟수도 극히 적었다.
택운이 알고 있는 정보란 그 정도였다. 생각보다는 많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저 겉으로 보는 모습과 소문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택운은 눈 앞의 빨간 목도리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재주가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목도리까지 짤 줄이야. 섬세한 맛 없이 얼기설기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그 덩치로 쭈그려 앉아 목도리를 짰을 생각을 하니 짠하기까지 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제법 예뻐 보이기도 했다. 택운의 길고 흰 손이 빨간 목도리를 헤집는다.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택운은 조금 전 점심시간에 사람 없는 교무실에 찾아와 목도리를 건네던 원식을 떠올렸다. 빨간 목도리는 초록색 박스에 포장되어 있었고, 원식은 목까지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초록색의 박스엔 흰색 리본이 깔끔하게 묶여있었다.
-크리스마스라서?
택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크리스마스를 챙길 만큼 그들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지나가다 인사나 하면 모를까. 원식은 누구에게 전해달라든지, ‘메리크리스마스’라든지 하는 말 없이 그저 박스를 주고선 인사를 꾸벅 하고 가버렸다. 쳐진 눈꼬리가 어느 때보다 더 쳐져 보여서, 택운은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박스에는 그 흔한 카드도 한 장 없었다. 뭐 어쩌란 거야.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선전포고인가.
2.
다음 날은 택운이 교문지도를 하는 날이었다. 원식이 준 빨간 목도리는 모양은 좀 구릴지언정 보온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택운은 단숨에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원식은 일찍 등교했다. 택운이 교문 앞에 선 지 십 분이 딱 지나서 왔다. 원식은 택운을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왔다. 입 꼬리가 잔뜩 올라가 광대가 마치 잘 익은 계란처럼 모양이 잡혔다. 맛있겠다. 아침엔 저기압이 심한 탓에 양껏 먹지 못한 택운이 입맛을 다셨다. 원식은 택운에게 인사를 하고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선 운동화 앞 코만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흰색의 운동화는 때 하나 없이 깨끗하다.
“…서, 선생님은 얼굴이 희어서 빨간 게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나 얘가 왜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지 알 것 같아. 하루가 지나서 겨우 듣게 된 말에 택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식은 그 말만 띄엄띄엄 해놓고선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얼굴은 어제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택운은 크단 손을 원식의 정수리에 턱 하니 놓고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원식의 머리통은 열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뜨끈뜨끈 했다.
“고맙다.”
원식이 숨겨지지 않는 웃음을 감추려고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그리고 우리 피어싱 안 돼. 김원식 벌점 20점.”
30점만 더 받으면 교내봉사네. 택운은 수첩에 원식의 이름을 쓰며 멍하니 생각했다.
3.
이제 곧 졸업하는 마당에 교내봉사라니. 원식은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가볍게 긁적였다. 피어싱 양 쪽 10점씩. 염색머리 10점. 넥타이 5점. 명찰 5점. 가방이 없어서 5점. 교내 휴대폰 사용 10점. 총 55점. 교내봉사 당첨이었다. 원식은 3년 내내 벌점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지각은커녕 다들 줄이는 교복도 하나 손대지 않았다. 물론 사고를 친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고로 교내봉사도 물론 처음이었다. 보통 수능을 치고 나면 3학년은 그런 제재에선 모두 해방되었다. 선생들은 보고도 모르는 척 해주었다. 그래서 원식도 3년간 참아왔던 모든 일탈을 해볼 생각이었고, 그리고 실천했다. 실천한 결과는 비록 좋지 않았지만.
원식은 넓디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택운은 싸늘한 표정으로 원식에게 목장갑을 던져주었다. 원식에게 떨어진 교내봉사는 ‘잡초 뽑기’였다. 학생들이 하교하고 난 운동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겨울이라 잡초는 별로 없겠지’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잡초가 없기는 했지만, 막아주는 것 없이 찬바람을 직빵으로 맞는 것이 고역스러웠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원식은 저가 택운에게 선물했던 빨간 목도리를 떠올렸다. 너무 뜬금없었나. 아니면 너무 어설펐나.
택운은 선물 상자를 뚱한 얼굴로 받았었다. 아무런 말이 없어서 그만 인사만 하고 나와버렸다. 옆 반 계집애들이 하도 열을 올리기에 수능도 끝났겠다 심심풀이로 따라 만든 것이었다. 사실 애들 여럿 괴롭혀가며 꽤 열을 올리고 만든 것이었다. 하다가 적어도 열 번은 풀었다 다시 짠 것 같다. 원식은 시무룩한 얼굴로 빨간 목장갑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빨강이 엄청 잘 어울리기는 했다.
원식이 상념에 빠진 사이, 저 멀리 교문서부터 빨간 목도리를 두른 장신이 천천히 걸어왔다.
“…졸아?”
택운이었다. 한쪽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원식은 넋이 나간 얼굴로 택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커피 컵을 감싸 쥔 손은 하얗고, 길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빨갛게 변한 택운의 손가락 끝을, 원식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저 손 끝에 닿을 수 있다면. 그냥 저 손 끝에 닿는다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 다였다.
“너는 뭐, 모카 사주까 모카?”
4.
기어코 모카 한 잔과 라떼 한 잔은 마주 보고 앉았다. 라떼는 거의 다 식어버렸고, 모카는 아직도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한 교무실은, 삭막하고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원식은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종이컵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택운의 목에 꽁꽁 둘러 싸매진 목도리와 대비해 원식의 교복 차림은 너무나 추워 보였다. 원식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택운은 가만히 원식을 관찰하고만 있었다. 별 다른 말도 없이. 원식은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러 넣었다. 친구들은 이미 오전에 하교해 신나게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통에, 원식은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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먈님 생선으로 쓰던거
많이 쓴 거 아까워서 올리긴 하는데 좀...아 구려... 못쓰겠음